4월 하순에 유물론에 조예가 깊은 어떤 친구가 찾아 왔다. 며칠간 낮과 밤을 계속해서 논의하였다.
우리는 세상 여러 가지를 두루 알기에는 게으르고 아는 것이 모자라는 자들이다. 유물론자와는 동과 서가 멀고, 적과 백이 다른 것처럼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호흡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친구를 주셔서 수고함이 없이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섭리의 은총을 감사하였다.
때로는 서로 흥분하기도 하며 때로는 서로 냉정을 찾아 가면서, 대체로 그는 많이 말하는 쪽이고 나는 대부분 듣는 쪽이었다.
말하며 또 듣는 동안에 놀란 것은 사회개혁에 대한 것, 특히 도덕 풍습에 관한 친구의 의견이 과격하지 않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유행하는 미숙한 청년들의 그것보다 아주 온건하고 타당한 것을 발견했다.
그 중에도 그의 ‘예수관’ 에서 놀랄 뿐 아니라 오히려 크게 배운 바 있었다. 그는 종교를 공격했다. 특히 종교 중에도 지배력이 있는 기독교를 배척했다.
그가 신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사상을 가진 유물론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을 믿은 데 대하여는 어떠한 이의도 없다고 했다.
기독교 교회와 그 신도는 밉살스럽지만 예수 자신은 비난할 점이 없으며 오히려 존경하고 사랑할 만한 유물론자라고 찬사를 그치지 않았다.
대개 적진을 공격하려면 그 본부를 폭격하고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아야 하는 법이다. 공격적 말싸움에 능한 그가 기독교와 그 교회와 신도는 업신여기고 더럽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예수는 존경하는 태도는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을 솔직하게 관찰한 것이라고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유물론자’라는 한 마디에서 우리는 수백 쪽의 주석책을 살펴본 것보다 더 큰 것을 깨달았다.
사도 야고보가 천추의 오해를 무릅쓰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 것은 등한시 할 수 없는 진리를 표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신앙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나 입을 것이 없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따뜻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14~17)
아무리 체계가 정연한 유심론을 주장하며 신학적 소양이 많은 인물이라도 유심(唯心), 유물(唯物)의 두 바퀴가 좌우에서 따로 논다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바퀴가 두 개라면 차라리 자전거 모양으로 같은 선상에 있어야 한다. 이왕이면 유심, 유물이 합하여 하나의 바퀴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사람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면서도 자기는 행하지 않는 종교가 무리(바리새인, 일종의 유심론자)의 위선을 향하여 그리스도는 격렬하게 반격하셨다. (마태복음 23장)
또한 그리스도는 부자 청년에게도 추상적인 윤리를 말씀하시지 않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따르라” 고 적확하게 가르치셨다.
예수 자신이 말과 행동에 두 바퀴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다. 예수를 유물론적으로 보면, 부패한 종교가는 물론이거니와 이론에 도취된 가짜 신도를 깨끗하게 쓸어 버리는 효험은 확실하다.